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.
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았는데, 막상 입을 떼려니까 할 말이 없더라고요. "요즘 어때?"라는 물음에 제 입에서 나온 건 결국 아이 이야기였어요. 오늘 아이가 뭘 먹었고,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, 밤에 몇 번을 깼는지.
전화를 끊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했어요. 분명 즐겁게 통화했는데, 어쩐지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한 것 같은 기분. 저만 이런 걸까 싶어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.
온종일 아이 말만 하다 보면
하루를 돌아보면 제가 쓰는 단어가 참 단출해요.
"맘마 먹자", "안 돼요", "코~ 하자", "우와 잘했어요". 아이 눈높이에 맞춘 짧고 다정한 말들. 그 말들이 나쁜 건 아니에요. 오히려 아이에겐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언어죠.
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른과 마주 앉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. 뉴스도 잘 안 보고, 요즘 뭐가 유행인지도 모르고, 내 생각을 길게 이어서 말하는 게 어색해졌어요.
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단어가 잘 안 떠오를 때, 문득 무서웠어요. 내 언어가, 내 생각이 점점 무뎌지는 건 아닐까 하고요.
세상은 저 없이도 잘 돌아가는데, 나만 어딘가 작은 방에 갇혀 아이 이름표를 단 채로 멈춰 있는 것 같은 기분. 그 헛헛함을 아는 엄마들, 분명 계실 거예요.
예전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사람이었어요.
책을 읽으면 밑줄을 긋고, 영화를 보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, 친구랑 카페에 앉아 세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수다를 떨던 사람. 그 사람이 어디로 갔나 싶어 거울을 한참 들여다본 날도 있었어요.
누가 물어봐 주지 않으니까, 나조차 내 이야기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았어요. 그게 제일 서글펐던 것 같아요. 저도 그랬어요, 정말로요.
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접어둔 거예요
그런데 며칠 전,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.
내 세계가 사라진 게 아니라, 지금 잠깐 접어둔 거구나. 아이를 품느라 두 손이 가득 차서 잠시 내려놓았을 뿐이지, 없어진 게 아니라고요.
그날 저는 아주 작은 걸 하나 시작해봤어요. 아이 재우고 나서 십 분, 읽고 싶었던 책을 딱 한 페이지만 읽는 거예요. 많이도 아니고 한 페이지요.
별거 아닌 것 같죠? 그런데 그 한 페이지가 어찌나 반갑던지. 오랜만에 어른의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는데, 잠들어 있던 제 생각이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었어요.
다음 날엔 좋아하던 라디오를 틀어두고 설거지를 했어요. 또 다음 날엔 오래 못 본 친구에게 아이 얘기 말고 "너는 요즘 뭐가 재밌어?" 하고 먼저 물어봤고요.
거창한 게 아니었어요. 하루에 딱 손바닥만 한 나의 세계. 그걸 매일 조금씩 펼쳐보는 것만으로도,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것 같았어요.
읽은 책 한 문장을 휴대폰 메모장에 옮겨 적기도 했어요. 짧은 문장 하나에도 '아, 나 아직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구나' 싶어서 괜히 코끝이 찡했어요. 그렇게 며칠이 쌓이니, 어른과 마주 앉는 일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더라고요.
무뎌졌다고 느낀 건 사실 무뎌진 게 아니라, 잠시 쉬고 있던 거였어요. 내 안의 나는 여전히 궁금한 게 많고,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더라고요.
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. 하루에 한 페이지, 노래 한 곡이면 충분해요. 그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다시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그려주더라고요.
그리고 신기하게도, 내 세계가 조금 넓어지니까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도 여유가 생겼어요. 나를 돌보는 일이 결국 아이를 더 다정하게 안아주는 힘이 된다는 걸, 저는 그제야 알았어요.
아이 말만 하는 하루라도 괜찮아요. 그 안의 당신은 여전히 반짝이는 세계를 품고 있으니까요. 조금씩, 아주 조금씩 펼쳐가면 돼요.
오늘의 다정한 정리
어른과 나눌 대화가 사라진 것 같아 헛헛한 날, 사실은 내 세계가 없어진 게 아니라 잠시 접혀 있던 거예요.
하루 십 분의 책 한 페이지, 좋아하던 노래 한 곡, 친구에게 건네는 나에 대한 질문 하나.
그 작은 시도들이 무뎌진 것 같던 나를 다시 깨워줘요.
아이를 키우는 이 시간이 나를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, 오히려 더 깊고 넓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시간이라고 믿어요.
우리 엄마들, 나의 세계를 너무 미안해하지 말고 조금씩 펼쳐가요.
저도 오늘 밤 또 한 페이지 읽어볼게요. 우리 같이 자라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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